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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8일 목요일

실학을 집대성하여 부국강병을 꿈꾼 정약용




실학을 집대성하여 부국강병을 꿈꾼 정약용




정약용은 1762(영조 38)∼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정약용은 요한이라는 이름(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정약전,정약종, 정약용 3형제 천주교 신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매형은 우리나라 최초 세례받은  이승훈이다.
정약용은 23세에 이벽(李蘗)으로부터 서학(西學)에 관하여 듣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서학에 심취했던 과거로 인해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정약용은 20대 초반에 서학에 매혹되었지만,
이후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주장과 부딪혀 끝내는
서학에 손을 끊었다고 고백했다.





천주교도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고
천주교인이라는 소문으로 나자 모두 정약용을 모른척했다.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순조 1)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손위 형인 정약종도 참수를 당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고
둘째 형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최초의 어류생태서 '자선어보'를 저술했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이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





정약용은
오랜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까지도 학문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인내와 성실, 그리고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성실을 제일로 친 사람이었다. 그의 방대한 저작은 평생을 통하여 중단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탄생한 것이다.


18년간의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정약용은 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
가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국가개혁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는 [경세유표]에서
 통치와 상업, 국방의 중심지로서의 도시건설(체국)과 정전법을 중심으로 한
토지개혁(경야)을 바탕으로 세제, 군제, 관제, 신분 및 과거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를 고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안의 주요 골자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때
당쟁의 여파로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花山)의 현륭원(顯隆院)으로  옮긴 것은 큰 뜻인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수원 화성과 같이 방대한 공사를 2년 반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종전과 차원이 다른 현대의 기중기와 같은 용도의 거중기를 사용하여
실학자인 정약용이 당대의 최첨단 기자재를 도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댓글 1개:

  1. 목민심서에 보면 목민관은 자기 백성을 자기 자녀같이 생각하고 대하라는 말이 너무 와닿았는데, 정약용 같은 실학자가 참 존경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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